티스토리 뷰

뽀빠이 이상용 MC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대한민국의 원조 국민 MC ‘뽀빠이 아저씨’ 이상용 씨가 2025년 5월 9일 오후 2시 30분경 별세했습니다. 향년 81세. 그는 서울 서초구 자택 인근 병원에 다녀오던 중 쓰러졌고, 급히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소속사 관계자는 “전날 함께 행사를 다녀오며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다”며 깊은 슬픔을 전했습니다.


약골 소년에서 ‘뽀빠이’가 되기까지
1944년 충남 서천군의 한 가난한 집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이상용 씨는 어린 시절 병약했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선 것이 3세, 겨우 걷기 시작한 것이 5세일 만큼 연약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는 11세 때 삼촌이 건넨 아령 한 자루였습니다.
가방에 도시락은 없어도 아령은 챙겼다는 그는 고등학교 시절 ‘미스터 대전고’에, 고려대학교 진학 후엔 ‘미스터 고대’에 오르며 건강과 체력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고려대 응원단장으로 활동하며 리더십도 발휘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60년 넘게 하루 두 시간 운동을 빠뜨린 적이 없다. 술, 담배, 커피도 단 한 번도 입에 댄 적 없다”고 말한 바 있으며, 자신의 삶이 ‘가장 약하게 태어나 가장 건강하게 산 사람’이라 자부했습니다.



방송계 입문과 ‘뽀빠이 아저씨’의 탄생
이상용 씨의 방송 데뷔는 1971년 CBS 기독교 방송이었습니다. 이듬해 MBC ‘유쾌한 청백전’에 보조 MC로 출연하며 눈에 띄기 시작했고, 1974년 K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이자 노래하자’ 진행을 맡으면서 ‘뽀빠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85~1986년에는 고(故) 송해 선생보다 앞서 ‘전국노래자랑’의 사회를 맡았고, 이후 MBC의 병영 위문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를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이끌며 명실공히 군 장병과 대중 모두의 MC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뒤에 계신 분은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고향 앞으로” 같은 유행어는 당시 안방극장의 웃음 버튼이었습니다.



횡령 누명과 인생의 전환점
1996년, 그가 설립한 심장병 어린이 수기집 후원 단체 ‘뽀빠이 훼미리’와 아동복지단체 ‘어린이보호회’(현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활동 중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누명이었고, 3개월 만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버스 가이드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하루 14시간씩 관광객을 인솔하며 살아갔고, 그의 입담은 미국에서도 통했습니다. 관광객 수가 크게 늘었고, 여행업계에서도 주목을 받았지만 아내의 간절한 설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 그리고 다시 무대 위로
귀국 후 그는 논밭에서 일당 2만5000원을 받으며 시골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에 대해 “가족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방송에도 다시 복귀한 그는 개그우먼 문영미와 함께 음반 ‘이상용의 폭소열차’를 발표하고, 지방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2009년에는 무대를 그리워하는 원로 가수 24명과 함께 ‘뽀빠이 유랑극단’을 창단해 공연 문화를 확장했고, 2019년에는 유튜브 채널 ‘뽀빠이 이상용TV’를 열어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끝없는 선행, 그리고 마지막 꿈
이상용 씨는 평생 나눔을 실천해온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외출할 때마다 1000원짜리 100장을 챙겨 폐지를 줍는 어르신에게 용돈을 나눠주었고, 환우에게 1800만원을 조건 없이 기부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그가 생전에 꿈꾸던 마지막 프로젝트는 ‘너희가 100세를 알아?’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노년의 건강한 삶과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단순한 방송인이 아닌 삶의 모범이자 공공의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횡령 사건 당시 입원했을 때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직접 위로를 받았고, 매일 아침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돈이 없어도 비굴하지 말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성내지 말라”고 늘 자신을 다독였다고 말했습니다.
원조 국민 MC
이상용 씨는 한국 대중문화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단순한 MC가 아니라, 그가 등장한 무대에는 건강한 웃음과 진심 어린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억울한 오해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남으려 노력했던 방송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약하게 태어났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강한 심장으로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뽀빠이 아저씨의 명복을 빕니다.
그가 남긴 건강, 웃음, 선행의 유산은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 Total
- Today
- Yesterday
- 뽀빠이유랑극단
- 김새론유작
- 돌싱연예인
- 공갈미수
- 이상용별세
- 이상민재혼
- 연예인재혼
- 기타맨개봉
- 산이레타
- 시골예능
- 연예계구설수
- 임신협박
- 이승기단절
- 이상민예비신부
- 이승기복귀
- 이상용mc
- 연예인협박
- 유명인범죄
- 주거침입논란
- 가오정
- 영화기타맨
- 산이피소
- 가는정오는정이민정
- 페임어스엔터테인먼트
- 힙합이슈
- 이승기논란
- 이찬원
- 한국방송역사
- 김새론마지막작품
- 건강아이콘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 2 | 3 | 4 | |||
| 5 | 6 | 7 | 8 | 9 | 10 | 11 |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 26 | 27 | 28 | 29 | 30 | 31 |
